자기 읍참을 통한 청렴과 부패청산 노력 역시 동일하였다.
이이는 물론 양친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비록 자신들이야 재상이 되지도 못했고 역할을 부여받지도 못했으나.
율곡이 정책건의서 『동호문답』은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다산의 글과 유사하다.그런데 고관대작 누구도 지적하거나 시정해주지 않고.두 사람 모두 ‘시의(時宜)를 제대로 알아 가장 현실적인 일에 넉넉하게 대처할 능력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아둔한 통치자라도.권력을 앞세워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진부하리라 여겨지는 옛말이 가슴에 딱 와 닿은 경우도 있다.
어지러운 시국을 바로잡을 참선비를 대망했건만 참선비를 발탁하여 국난을 해결할 군주도 없었기에 나라는 끝내 망하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150년이 지난 현재의 역사가들 역시 이 시기를 평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 지식인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도 당시 일본은 이상적인 국가였다.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 상호 간에 원인과 결과를 제공했다.
이렇게 구한말의 역사는 하나의 원인에만 책임을 돌리기에는 너무나 복잡했다.해답은 하나에 있지 않다.